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사할린 침공 (문단 편집) == 전개 == 만주 전역이 8월 9일에 개시된 것과 달리, 소련의 남사할린 침공은 8월 11일을 기해서 이루어졌다. 88사단 수뇌부는 소련의 참전 소식을 듣고 급하게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 88사단은 미군의 침공에 대비하느라 방어시설이나 주력부대의 배치를 섬 동해안에 집중했기 때문에 이틀동안 급하게 병력과 장비를 소련 국경으로 옮기느라 고생해야 했다. 8월 11일, 전 국경선에서 일제 포격과 함께 소련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만주 전역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은 일제포격 후 병과간의 유기적인 협조하에 일본군의 방어선 돌파를 시도했는데, 일본군은 명백한 전력의 열세에도 곳곳에서 성공적으로 방어전 및 지연전을 수행했다. 일본군 88사단은 상대적으로 가라후토에서 징집된 인원도 많아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사기가 높았고, 태평양 전쟁의 다른 전투와는 달리 조금이라도 밀리면 일본 민간인들이 휩쓸린다는 위기감과 여기서 패하면 본토가 위험하다는 절박감 등이 겹쳤기에 열악한 전력에 비해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했다. 여기에 러일전쟁 이후 북위 50도선을 따라 만들어 둔 방어시설의 덕도 보았다. 그러나 전력의 열세는 뒤집을 수 없어서 전선 곳곳에서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소련군도 초기에는 총력을 다해 공세를 가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일본이 항복한 뒤인 8월 19일, 소련군 해병대는 [[해군]]의 호위와 함께 사할린 섬 남서쪽에 위치한 마오카(러시아명 홀름스크)에 [[상륙작전]]을 펼쳐 순식간에 [[항구]]를 함락했다. 마오카를 점령한 소련군은 오도마리(러시아명 [[코르사코프]])로 진격을 개시했다. 오도마리는 홋카이도의 [[왓카나이]]와 연결되는 항구로서, 이곳이 소련군의 수중에 떨어지면 가라후토에 남게 된 일본군과 민간인들은 본토에서 완전히 격리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일본군도 격렬히 저항했지만 마오카에 상륙한 부대가 육로로, 그리고 또 다른 상륙부대가 해로로 각각 오도마리를 협격했다. 8월 25일, 결국 소련군에 의해 오도마리가 함락되었다. 그리고 소련군의 후방상륙으로 전선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주공인 소련군 56군단 본대는 가라후토의 중심도시인 도요하라(러시아명 [[유즈노사할린스크]])를 점령했다. 이 시점에 이르러 가라후토의 일본군은 전선이 완전히 붕괴되고 각지에서 고립된 채 절망적인 저항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날인 8월 26일, 일본군 88사단이 소련군에 공식 [[항복]]함으로써 전투가 종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